일상/음식

[소주]화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삼봉님 2022. 10. 22. 00:18
반응형

화요17도

 

너 그때 그 놈이었구나?!

화요를 처음 보게된 건 PX에서이다.

군인이었던 스물 한 살 나에게 PX에서 사는 물품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근무를 나가기 전에 한 봉지씩 까먹던 가나파이.
권장소비자가격보다 월등히 저렴해 손이 갔던 수미칩 양파맛.
탄산가득한 칠성사이다.
그리고 에쎄 체인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유달리 그 친구들만 선택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선반 구석에 박혀있는 주류들을 볼 때가 있었는데 그때 화요를 처음 봤다.
물론 기간병은 주류를 구매할 수 조차 없지만 군납이라는 늠름한 낙인이 박힌 물품은 같은 낙인이 찍힌 이들에겐 오히려 외면의 대상이 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사회에 복귀 후, 점점 잊혀지고 있던 중 증류식 소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휘발되기 직전의 화요의 이름이 집 앞 마트에서 주류코너를 보다 떠올랐다.

'너 그때 그 구석에 박혀있던 그 놈이었구나!'

알고보니 척박한 대한민국 증류주 시장에서 악착같이 버텨서 인정을 받고 있는 놈이었다.

내가 처음봤을 때 군납이란 표시를 낙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건 소주계의 훈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놈들 골라야 하나?

집 앞 마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옛 모습의 추억때문인지 하나 가져가기로 결정을 했다.

매번 사먹던 소주의 소매가격이 천원대였던 걸 감안하면 열 배 남짓한 가격이었지만 10년 전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준 대상에게 그깟 몇 푼이 대수랴.

나는 가장 저렴한 화요17도를 골랐다.
25도를 고르고 싶지만 아무래도 소주 한 병을 2만원 가까이 주고 사먹기가 아직은 쉽지 않다.

곁들일 냉동식품 하나를 마저 고르고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계산원 아저씨(아마 아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가 무엇인가를 나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저거는 17도보다 25도가 더 맛있어요!"

"아 그래요?"

차마 '가격이 비싸서 사기가 어렵네요.'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음에 꼭 25도 사볼게요"하고 계산을 하고 부리나케 출입문을 나왔다.

'다음에 (계좌에 있는 종목들을 익절하면) 꼭 25도 사볼게요!'

익숙한 도수,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소주의 향과 맛 그리고 헤프닝

일반적인 희석식 소주(초록색 병)와 비슷한 도수라서 그런지 먹기 부담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아쉬울정도로)

그래도 분명 차이는 있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소주의 그 화학적(?)인 향 대신 향긋한 냄새가 났다.
맛 또한 자연스레 은은한 단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사실 유튜브에서 들은 증류식 소주의 설명이 생각나긴 했지만, 배경지식 때문이 아닌 나의 감각으로 평가한거라 애써 스스로를 속이며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취기가 슬며시 돌때쯤

마치 소믈리에라도 된 듯 두꺼비가 그려진 소주잔에 눈을 감은채 코를 박고 냄새를 들이 맡았다.
'흐읍~ 흐읍~'

'흡!!'

거리 조절에 실패해 비강으로 알콜이 들어왔다.
연신 기침이 나고 콧속이 알싸해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얄궂게 흐르고 있는 눈물 콧물을 닦으며 화요를 바라 보았다.


웃기지만 그렇게 나의 증류식 소주의 입문은 시작되었다.


반응형